국내 주요 기업과 해외 선진 기업의 기술 격차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가전과 디지털 제품은 세계 시장에서 프리미엄 제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LG전자, 삼성전자, 현대자동차는 인터브랜드가 선정한 세계 100대 브랜드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세계 주요 디자인상도 국내 기업들이 석권하고 있다. 이처럼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의 선전 소식을 들으면 가히 가슴이 벅차 오른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면 그렇게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생산 공정과 디자인에서 선진 기업과의 격차를 좁히고는 있지만 R&D와 마케팅에서는 여전히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부가가치가 높은 원천 기술이 부족하고 보유 기술의 상품화 역량도 약점으로 꼽힌다. 외형에 비해 내실이 미흡한 것이다. 또한 이런 와중에 중국 업체는 풍부한 노동력과 적극적인 기술 개발, 그리고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한국을 바짝 추격해오고 있다. 올해에는 중국의 R&D 투자가 일본을 추월하고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R&D 거점으로 부상했다고 한다. 선진 기업과 중국 기업의 사이에 끼여 압박을 당하는 ‘넛 크래킹(Nut Cracking)’ 신세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렇듯 한국 기업의 약진에도 불구하고, 경쟁 기업들을 제치고 멀찌감치 앞서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앞서 가는 경쟁자를 쫓아가는데 익숙할 뿐 경쟁자가 없는 시장을 개척해나가는 비전과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블루오션을 추구하는 기업도 기존 시장에서 부분적인 개선과 변화를 시도할 뿐 시장 자체를 바꾸는 것은 쉽사리 엄두를 내지 못한다. 창조와 혁신을 목청껏 주창하면서도 끝내 비용 절감과 운용 효율성으로 회귀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답보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답은 새로운 미래를 그려내고 만들어가는 역량에 달려 있다.
뛰는 기업과 나는 기업
지금 당장 눈앞의 문제에 급급해 미래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쳇바퀴만 돌리고 있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미래를 사전에 예측하고 준비해가는 기업이 있다. 요즘처럼 불확실한 경영 환경에서 외부 시장 변화에 단기적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장기적인 흐름을 읽어내는 선견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미래를 준비하는 방식에서도 다른 기업을 선도하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이를 수동적으로 쫓아가는 기업이 있다.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있는 미래라면 누군가에 의해 이미 제시된 것이다. 능동적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기업은 남들이 제시한 미래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미래를 그리고 남들을 동참시킨다. 여기서 바로 선도자와 추종자의 길이 갈라진다.
경영 전략가인 게리 해멀(Gary Hamel)은 경영진이 미래에 대한 합리적이고 명확한 답변을 갖고 있지 않거나 현재와 큰 차이가 없는 답변을 가지고 있다면 미래 시장의 선도 기업으로 살아 남을 확률이 적다고 역설한다. 비록 현재 시장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미래에 같은 위치를 보장받을 수는 없다. 동일한 맥락에서 지금은 추종자라고 하더라도 미래의 경쟁을 준비하는 기업은 선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기업들은 지금까지 선진 기업들이 형성해가는 미래를 신속하게 이해하고 발 빠르게 동참하는 방식으로 성과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한국 기업 스스로가 미래를 제시하고 다른 기업들을 변화에 참여시켜야 진정한 선도자로 거듭날 수 있다.
미래를 창조하는 기업의 조건
기존의 미래 예측이 학문적 차원에서 이루어져 왔다면 최근 기업의 미래 예측은 적극적인 비즈니스 창출을 목적으로 수행된다. 기업은 다양하게 발생할 수 있는 미래 시나리오 중에 자사의 의지가 반영된 미래를 그려낸다. 미래 연구의 목적은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변수가 만들어낼 복수의 미래들 중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기업이 원하는 미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고객과 다른 이해 관계자들에게 미래상을 공유하고 동참시켜야 한다. 그러면 매력적인 미래를 제시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해나가는 방안은 무엇이 있을까?
● 매력적인 비전을 제시하라
글로벌 선도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산업의 미래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새로운 시장을 정의하는 능력이 반드시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사업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고 미래상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이 필요하다. 미래상은 담론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이 아니라 현실감 있게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고객과 관련 업체에 공감대를 불러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인텔은 매년 전세계 엔지니어들을 참여시킨 가운데 개발자 회의(IDF: Intel Development Forum)를 개최한다. 여기서는 신제품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PC, 디지털 가전, 통신 등 다양한 IT 분야의 이슈와 기술 전망을 제시하며 관련 업계에 직간접적인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올해 3월에 개최된 IDF 행사에서는 모든 IT 제품과 서비스가 인터넷 기반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미래상을 제시하였다. 현재는 컴퓨터와 휴대폰이 중심이었으나 향후에는 TV나 IT 서비스 등 모든 관련 서비스가 연결된다는 것이다. 인텔은 이런 미래상에 기초해 반도체 칩 회사에서 디지털 플랫폼 기업으로의 변신을 비전으로 제시하고 있다. PC의 울타리를 뛰어 넘어 소비자 가전과 이동 통신, 디지털 홈, 헬스케어 등 다양한 영역으로 사업 범위를 확장하고 표준화를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가전 업체도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마케팅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유비쿼터스(Ubiquitous)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술 환경을 의미한다.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유럽에서는 환경 지능(Ambient Intelligence)이 제시되고 있다. 유비쿼터스가 다분히 기술 지향적인 개념이라면 환경 지능은 인간과 기술의 상호 작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환경 지능 환경에서는 복잡한 디지털 기기들이 생활 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져 버린다. 일상 생활에서 접하는 거울과 침대, 손목시계가 부지불식 간에 디지털 기기의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필립스는 환경 지능을 기술 비전으로 수립하고 관련 기술 로드맵을 도출하여 기업 이미지 제고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환경 지능이라는 장기적인 비전 하에 ‘Sense & Simplicity’라는 단기 슬로건을 제시하고 이를 비전 마케팅에 연계시킨다. 그런데 이를 제품의 사용 편리성과 디자인의 단순성을 뜻하는 브랜드 슬로건으로만 이해한다면 장기적인 비전과 실체를 간과하는 것이다.
지멘스는 ‘Inventing the Future’라는 구호 아래, 미래 연구를 수행하여 신사업 기회를 탐색하고 기업 전체의 통합된 기술 비전을 마련하고 있다. 매년 두 차례 발행하는 보고서를 통해 각 사업 분야별 미래상을 알기 쉽게 제시하고 해당 미래를 실현시키기 위한 지멘스의 기술을 동시에 소개하고 있다. 이를 통해 미래를 창조하는 기업이라는 브랜드 이미지도 함께 제고시키고 있다.
● 미래에 동참시켜라
매력적인 비전을 수립했다면 이를 적극적으로 확대 재생산시켜야 한다. 정치학자인 조셉 나이(Joseph Nye)는 상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안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경제력이나 강압적인 힘을 통해 강제로 움직이는 하드 파워(Hard power)이고, 다른 하나는 남이 매력을 느껴 스스로 따라오게 하는 소프트 파워(Soft power)이다. 현재 아무리 독점적인 지위를 확보한 기업이라도 미래에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는 제약이 따른다. 그렇다면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남들도 매력적으로 느끼게끔 전달하고 자연스럽게 동참을 유도해야 한다.
다른 이해관계자들을 동참시키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비전, 시장에 대한 구체적인 예측과 전망, 그리고 필요하다면 제품 개발 계획과 연구 성과 등을 공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인텔과 IBM, 마이크로 소프트 등 IT 업체들은 자사의 미래 기술을 시장 표준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캠페인을 전개하고 전략적 제휴를 체결한다. 기술 로드맵을 제시하거나 공개되지 않은 제품 개발 계획 등을 공유함으로써 부품 제조업체와 경쟁사를 자사의 의도대로 리드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애플은 인터넷의 생활화와 음반 시장의 변화를 기반으로 새로운 음악 시장을 예측하였다. 그러나 2003년에 애플사가 음악 다운로드 서비스를 시작하려 할 때, 대부분의 음반업체들은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미 냅스터 등 불법적인 음원 공유 서비스에 의해 시장이 혼란해진 이후라 음반업체들은 디지털 음원 자체가 사라지기를 바랬다. 반면, 스티브 잡스는 디지털 음원 시장의 확대라는 비전을 심어 주고 음반업체의 동참을 유도하였다. 마침내 애플은 인터넷과 결합된 MP3 플레이어 사업과 음악 다운로드 서비스를 확산시키며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개별 기업이 아니라 업계 공동으로 미래상을 제시하고 확산시켜 가는 경우도 있다. 미국내 화학 기업들과 관련 협회는 ‘Chemical Industry Vision 2020’이라는 연구 협의체를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 화학 산업의 미래 비젼을 수립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기술 과제를 도출하였다. 이를 토대로 2000년대 초반에는 2020년까지 달성해야 할 기술 로드맵을 제시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학계의 연구와 정부의 정책 수립 및 자원 배분이 진행됨에 따라 협의체가 꿈꾸는 미래가 차곡차곡 현실화되고 있다. 또한 협의체를 통해 수행된 중간 산출물들이 공개되고 관련 업계에 전파됨으로써 다른 이해 관계자들의 참여도 확대되고 있다.
● 라이프 스타일을 창조하라
매력적인 비전을 공유하고 자신의 미래상을 확산시켰다면 이제 구체적인 실체로 고객들에게 다가서야 한다. 고객이 관심을 가지고 공명을 할 때에 미래는 비로소 현실이 된다. 이를 위해서는 고객에게 미래의 생활 방식을 제안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에 필요한 상품을 제공해야 한다. 단순히 히트 상품 몇 개를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해야 한다. 고객은 개별 제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주요 선진 기업들은 R&D 전략도 미래 시장의 니즈와 고객의 라이프 스타일 변화를 고려하여 장기적이고 일관된 관점에서 수립한다. 이에 반해 한국 기업들은 단기적인 R&D와 히트 상품 개발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시장과 제품, 기술간의 시너지가 부족하고 고객의 라이프 스타일은 커녕 개별 제품의 기능과 디자인에 급급하게 대응하곤 한다.
모토롤라는 올해 4월에 발행한 「Generation HERE」라는 보고서를 통해 세계 14개국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라이프 스타일을 추적하고 향후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점차 다기능화되어 가는 휴대폰이 소비자의 사용 패턴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고 이를 제품 개발과 마케팅에 활용하는 것이다. 휴대폰의 기능과 디자인 개발에 앞서 소비자의 모바일 라이프 스타일 변화를 읽고 반영하기 위함이다.
올해 비즈니스 위크지에 의해 세계 1위의 혁신 기업으로 선정된 애플은 창업이래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MP3 플레이어인 아이팟을 출시해 전세계 MP3 플레이어의 약 70%를 점유하였고 매출은 출시 이후에 두 배까지 성장하였다. 아이팟은 제품의 기능과 디자인에만 머물지 않고 심플하고 세련됨을 추구하는 도시적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함으로써 젊은이들의 새로운 문화 코드로까지 평가되고 있다.
더 나아가 애플은 디지털 음악에만 머물지 않고 동영상 다운로드 사업으로 확장하여 멀티미디어 컨텐츠 분야에 독보적인 지위를 구축해나가고 있다. 아이툰즈(i-Tunes) 서비스를 통해 유선이든 무선이든 네트워크에 상관없이 디지털 컨텐츠를 다운로드 받도록 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PC와 MP3, 휴대폰, TV를 상호 연결하는 유비쿼터스 미래와 라이프 스타일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이렇듯 선진 기업들은 개별 히트 상품 개발에만 머물지 않고 장기적인 미래 계획의 일환으로 일련의 제품들을 출시하고 있다. 또한 이를 단순한 제품이 아닌 동참하고 싶은 라이프 스타일의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이끌려 갈 것인가? 이끌 것인가?
경영 컨설턴트인 램 차란(Ram Charan)은 경영자의 요건으로 사업 통찰력을 강조한다. 여기서 사업 통찰력은 매출과 원가 등 사업 내적인 영역에만 그치지 않고 외부 사업 환경과 미래 구도 변화까지 포괄한다. 랜 차란은 이를 ‘전체상(Big Picture)’으로 표현한다. 요즘처럼 유가 상승 시에 일반 경영자들은 원가 상승과 매출 감소에 대해 고민하지만, 통찰력이 있는 경영자는 유가 상승을 결정하는 원유 수급 요인과 이러한 요인들이 변화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미래의 파급 효과를 큰 그림으로 살펴본다. 이를 통해 새로운 기회 요인을 찾아 내는 것이다.
기업은 미래 전략을 능동적으로 수립함으로써 자사에 유리한 미래를 선점하고 지속적인 생존과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시점의 전체상을 벗어나 미래까지 반영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특히 한국 기업들이 빠른 추종자에서 선도 기업으로 나서기 위해서는 해외 선진 기업들 보다 한 발 더 미래상을 그려내고 더욱 매력적인 미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선두가 되고자 하는 기업은 오늘 이 시점에서 내일을 그리고 있어야 한다.
(장강일. LG주간경제 200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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